상처가 가져다준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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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술 후 몇 가지를 잃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잃은 것 때문에 몇 가지를 오히려 얻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맛이다.
맛을 잃고 행복을 얻다
좌측 안구를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제거술을 한지라 몸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몇 달 동안 방사선 치료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 준 죽은커녕 물조차 삼키기 힘들었다. 사실 음식을 먹는게 아니라 고통을 삼키는 상황이었지만 걱정하는 아내 때문에 내색하지 않으려 눈물로 통증을 삼켰고 몇 주 후에는 그마저도 모두 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음식이 아닌 통증을 삼켰다가 또 토하는 고통은 방사선 치료가 끝날 때까지 반복되었다. 물론 방사선 치료가 마치자 삼킬 때의 통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전혀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무취 무미한 뭔가를 삼켜야 하는 삶이 마치 흑백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무미건조했던 나의 식탁이 총천연색의 컬러로 바뀐 2020년 7월 18일 점심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도 오로지 몸에 영양소를 제공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힘 없이 수저를 들고 국을 떠서 마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구수하고 짭조름하고 시원하고 향긋한 맛과 향이 입안 전체에 퍼지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 다른 반찬을 맛보는데 새콤하고 달콤한 맛들이 입안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고 이내 나의 영화는 칙칙한 흑백 필름에서 총천연색 컬러로 바뀌었다. 순간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입에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하는 탄성이 나왔다. 식사를 하다 말고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에 놀란 아내도 이 사실을 알고 함께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렇게 다양한 맛과 향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깨닫고 그날 나는 하나님이 수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드신 이유를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 너무 맛있어요. 너무 행복해요. 너무 즐거워요. 너무 재밌어요.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주시려고 모양도 맛도 다른 수많은 음식을 만드셨군요.” 그날 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머리가 아닌 감각을 통해 실제적이고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때의 감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어 있다.
얼굴을 잃고 눈물을 얻다
수술로 잃게 된 두 번째는 얼굴과 목소리였다. 수술 후 마주한 나의 모습은 기괴하고 초라했다. 왼쪽 광대뼈와 치아 전체가 사라져 얼굴은 함몰되고 입천장이 뚫려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고 코와 입으로 음식이 흘러내렸다. 이런 나를 힐긋힐긋 반복해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감정들을 던져 주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불쌍함, 괴상함, 혐오스러움, 경계심, 거리낌, 두려움과 같은 정서를 느꼈고 그로 인해 창피함, 서글픔, 우울함, 좌절감, 위축감에 시달렸다.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된 내 안의 감정들은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이어서 두렵기까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들이었다. 그렇게 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너무나 강하고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나를 불쌍히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나약하고 불쌍한 내 자신이 너무도 가여워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망가지고 상처 입고 초라해지는 경험을 통해 그런 나를 오롯이 느끼고 맛보고 나니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형편과 그로 인한 그들의 심정과 마음이 전보다 또렷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전에는 잘 알아차리지 못했던 아이들과 아내의 감정을 훨씬 많이 깨닫게 되었고 성경을 묵상할 때도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십자가에서 겪으신 예수님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지식적 이해에 그쳤다면 지금은 그분의 감정이 보다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감정을 읽다 보면 때론 너무 마음이 아프고 슬퍼서 한참을 울기도 하고 때론 기쁘고 감사해서 혼자 웃기도 했다. 수술 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지금의 상황 중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지금의 나를 선택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이유는 수술 전에는 갖지 못했던 느낌과 감정에 대한 알아차림을 결코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과 목소리 대신 눈물을 얻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소리를 잃고 소명을 얻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나는 이 얼굴과 목소리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수업으로 바뀌고 혹 대면을 해도 마스크를 써야 했기 때문에 얼굴을 노출하지 않아도 되었다. 심지어 국가에서는 코로나 지원금까지 주었다. 그렇게 나에게 코로나는 위기가 아닌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통독하던 중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 된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람,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레 21:18, 쉬운말)라는 말씀에 가슴이 턱 막혔다. 내가 바로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인데 어떡하지? 이제 난 목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목회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발음이 부정확해서 설교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아내에게는 차마 말을 못하고 혼자 고민에 빠졌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고민을 들으신 하나님은 며칠 뒤 성경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치기로 한 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 품종이 좋다고 나쁜 것으로 바꾸어서도 안 되며 또 나쁘다고 해서 좋은 것으로 바꾸어서도 안 된다. 다른 것과 바꾸려 하면 둘 다 거룩한 것이 된다”(레 27:10, 현대어). 이럴 수가! 하나님께 이미 바쳐진 것은 이미 거룩하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비록 부족하고 흠 있는 사람이지만 이미 드려져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저를 바칩니다.” 기도의 응답일까? 발음이 좋지 않아 설교를 듣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에도 불구하고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목회자로부터 한 달에 한 번 설교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렇게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미 바쳐졌기에 거룩하게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설교단에 섰던 그날, 내겐 너무나 감격적이고 벅찬 날이었다. 그때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동이 밀려온다. 성도님들은 발음이 좋지 못한 나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마치 영어 듣기 평가를 치르는 고3 수험생들처럼 귀를 쫑긋 세워 집중하셨고, 마치 학예 발표회에 나간 아들을 응원하는 부모처럼 격려의 아멘을 외쳐 주셨다. 그날 나는 성도님들의 응원을 통해 목회자로 다시 설 수 있다는 용기와 확신을 갖게 되었고 목자와 양의 관계가 아닌 믿음 안의 친구요 동료인 관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렇게 잃은 것 때문에 오히려 얻는 경험을 하면서 선지자의 말씀처럼 전진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우리가 대항한 모든 시험과 우리가 용감하게 견딘 모든 시련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며 품성 형성이라는 과업에서 우리를 전진하게 한다”(MB, 117).
- 박동현 경기도 광주교회 담임목사 -